달아실시선

오래 문밖에 세워둔 낮달에게

  • 저자 : 박숙경
  • 출판사 : 달아실출판사
  • 발행일 : 2024년 04월 26일
  • 페이지 : 136면
  • ISBN : 979-11-7207-010-6 (03810)
  • 정가 : 11,00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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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쉽죠? 절룩이라는 문장의 완성
― 박숙경 시집 『오래 문밖에 세워둔 낮달에게』


2015년 『동리목월』 여름호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박숙경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오래 문밖에 세워둔 낮달에게』(달아실 刊)가 달아실시선 77번으로 나왔다.

박숙경의 두 번째 시집(『그 세계의 말은 다정하기도 해서』)의 해설에서 신상조 문학평론가는 박숙경의 시를 “사색의 서정”이라 정의하며 다음과 같이 평했다.

“박숙경의 시는 일차적으로 군더더기 없는 ‘절제의 미학’으로 다가온다. 언어를 학대하거나 비틀고 왜곡하는 작금의 전복적 시작(詩作)과 다른 방향의 길을 걷는 시인의 시어는, 숙련된 보석 세공자의 언어처럼 정교하고 치밀하다. (중략) 이미지의 구사가 뛰어난 박숙경의 시는 작은 풍경의 조각들로 곱게 기워진 서정의 조각보이다. 풍경은 시의 내용이자 형식이고, 시어이자 행이고 연이며 시의 근본이다.”

이번 시집의 발문을 쓴 시인 전윤호는 박숙경의 시를 이렇게 얘기한다.

“박숙경의 시는 차분하다. 좀처럼 감정이 들뛰지 않는다. 그리고 중요한 장점이 있었다. 그건 사물에게 말을 시킬 줄 안다는 것이다.

“박숙경 시인은 시를 시작하는 방법이 경쾌하다. 시작이 반이라고 독자의 관심을 끌려면, 독자가 끝까지 시를 읽으려면, 좋은 시작은 필수인 셈이다. 아마 시상이 떠오를 때 좋은 시작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박숙경 시인은 자신만의 뜰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뜰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나무들과 꽃에 관해 시를 쓰는 것이다. 그 안에는 사람들과 시간들이 줄줄이 서 있기도 하지만 모두 그녀의 품 안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사과가 완성되기를 기다린다. 이런 차분함은 박숙경 시인의 큰 미덕이다.”

‘지난 두 시집과 비교했을 때 이번 시집에서 달라진 게 있다면 무엇인지, 이번 시집을 통해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주요 메시지는 무엇인지’를 물었더니 박숙경 시인은 이렇게 답했다.

“지난 두 시집에 비해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다만 꼼꼼히 들여다보면 시의 중심이 ‘나에서 너와 우리’로 옮겨진 것을 눈치 챌 수 있을 겁니다.”

“시집을 준비하면서 하나의 메시지만을 염두에 두진 않았지만, 굳이 하나를 꼽자면 희망입니다. 비록 복잡다단한 세상이지만 쌀알만 한 꿈 하나 지니고 있다면 말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희망 말입니다.”


절룩절룩 책 부치고 오는 길
접질렸던 왼발에 무게가 더 실려요

시든 장미 옆으로 유모차가 지나가요
쌍둥이 중 한 아기가 손가락을 빨아요
나의 절룩과 아기의 손가락 사이엔 결핍이라는 말이 있어요

소공원 벤치에 노인 몇 나란히 앉아
폭염보다 더 뜨거운 고독을 뜯어내는 중이에요
고독은 삼각형, 꼭짓점은 무엇이든 끌어당겨요
어디선가 달려온 소낙비 한줄기 넘어지고
절룩이 모여 여름을 견디는 풍경이라고나 할까요

신호등이 초록으로 바뀌면
절룩을 감추고 하나도 안 아픈 사람처럼 걸어요
아직 꺼내놓을 용기가 내겐 없는 거죠
절룩을 앓기 전엔 누구의 절룩도 보이질 않았어요

나의 절룩을 내가 읽었을 때
비로소 우리의 절룩이라는 문장이 완성된다는 걸
수많은 절룩 속에서 깨닫는 오후예요

화단의 치자꽃이 마지막 향기를 토해요
잠시 절룩을 잊고 그 옆에 쪼그려 앉아요
― 「절룩」 전문


이번 시집의 편집자이기도 한 박제영 시인은 박숙경 시의 장점이 ‘친절의 미학’에 있다며 이렇게 얘기한다.

“처음 그가 건네주고 간 원고를 읽었을 때, 화가 밥 로스를 떠올렸다. 티비 프로그램에서 그가 ‘참 쉽죠?’라는 말을 연신 내뱉으며 캔버스에 붓질을 몇 번 하는가 싶으면 정말로 멋진 풍경화가 펼쳐지곤 했었다. 밥 로스의 ‘참 쉽죠?’란 말은 한때 장안에 화제가 되었지만 그 말의 깊이와 속뜻을 아는 이는 드물었다. 좋은 시가 그렇다. 읽기에 참 쉽다. 하지만 그렇게 쓰기가 실제로는 무척이나 어렵다는 것을 아는 이 또한 드물었다. 그의 원고를 두어 번 더 읽었을 때, 어느 철학자의 말을 떠올렸다. ‘결핍의 순간이 되었을 때 삶은 명징하게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시는 결핍의 칼날 위에서 피어나는 문장을 건지는 작업일 텐데 그의 시집이 어쩌면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가 얘기하는 ‘절룩이라는 문장의 완성’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기로 했다.”

불편한 시집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가끔은 이런 친절한 시집에 기대보는 것도 좋겠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내 안의 사과 하나 빨갛게 익어갈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