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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자

  • 저자 : 박용하
  • 출판사 : 달아실출판사
  • 발행일 : 2024년 02월 23일
  • 페이지 : 100면
  • ISBN : 979-11-7207-002-1 (03810)
  • 정가 : 11,00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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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눈에는 그 사람의 심장이 올라와 있다
― 박용하 시집 『견자』 17년 만에 개정 복간


<달아실어게인 시인선> 네 번째 작품으로 박용하 시인의 시집 『견자』가 출간되었다.

『견자』는 2007년 열림원에서 나온 박용하 시인의 네 번째 시집으로 당시 사회의 “타락한 말”에 대한 냉소와 개탄을 통렬하게 담아내어 평단과 세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당시 시집 『견자』에 대한 평을 몇 개만 살펴보자.

랭보 이후, ‘견자’라는 개념은 하나의 문학적 아우라로 기능해왔다. 박용하의 『견자』가 지속적으로 랭보의 시론(詩論)을 연상시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중략) 박용하의 ‘견자’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아니, 말의 세계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는 “순간의 영원”에서 “하늘 눈동자가 열리는 소리”(「배터리도 없이」)를 듣는다. 그러므로 그는 “고통받는 자”가 아니라 “고통하는 자”(「강물」)이며, 사랑받는 자가 아니라 사랑하는 자이다. 견자, 순간에서 영원을 보고, 언어의 길이 닿지 않는 곳에 언어의 그물을 드리우는, 그러면서도 끝내 인간과 말을 그리워하는 존재. 이 이율배반의 심적 상태는 침묵을 잃어버린 말들이 넘쳐나는 이 세계에 대한 비판을 함의하고 있다. (중략) 이처럼 ‘말’로 상징되는 언어에 관한 자의식은 『견자』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이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견자(見者)의 시선과 언어가 맺는 상관성을 암시하는 시적 장치처럼 보인다. 그는 “말만 많은 것들”의 말이 아니라 “여벌이 없는 것들”(「입김」)이 내뿜는 침묵의 언어를 소망한다. 그렇기 때문에 ‘말의 세계를 신뢰하지 않는다’라는 진술이 언어에 대한 단순 부정으로 읽혀서는 안 된다.
― 고봉준(문학평론가)

박용하의 네 번째 시집 <견자>(見者, 열림원, 2007)에는 유독 말의 타락을 개탄하고 냉소하는 시들이 많다. 예컨대 다음 구절에 시인의 의도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믿음을 걸고 나열하는/ 줄줄 새는 낙원의 말들 앞에서/ 주워 담을 길 없이 떨어지는 가을날의 잎들처럼/ 입은 철들지 않았고 사람들은 물먹었다.”(「새털구름」) 조심하라, ‘낙원의 말들’이 창궐할수록 ‘말의 낙원’은 모욕당한다. 그 말들은 당신을 물 먹일 것이다. 이것은 거창한 얘기가 아니다. 말의 인플레이션은 일상에서도 엄연하다. “답변기계들처럼/ 답변기계들처럼/ 말끝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시에다 시인은 ‘…최악을 다하겠습니다’라는 제목을 얹어놓았다. 이 위악적인 재치가 ‘최선’이라는 말에 침을 뱉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때문에 우리는 ‘최선’이라는 말의 본래 의미를 되새기게 되는 것이다. (중략) 이러니 말이라는 것은 얼마나 난해한 숙명인가. 그래서 다음 시는 이렇게 비장하다.

뒤는 절벽이고
앞은 낭떠러지다

돌이킬 수 없는 허공에서
너는 뛰어내린다
너는 그처럼 위험하고
너는 그처럼 아슬아슬하다

돌이킬 수 없는 생처럼
한 번 가버리는 생처럼
뒤돌아봐도 그만인 사람처럼
너는 절대 난간에서 뛰어내린다

아마도 너의 뿌리는
너도 대부분 모를 것이고
너의 착지도 너의 얼굴은 영영 모를 것이다
― 「입」 전문

뒤는 절벽이고 앞은 낭떠러지인 것이 무엇일까. ‘입’일 것이다. 입 속은 절벽이고, 입 바깥은 낭떠러지가 아닌가. 그렇다면 거기서 ‘뛰어내리는 너’는 말일 것이다. 말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너의 뿌리”), 그 말이 어디에 도달할 것인지(“너의 착지”)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이 난해한 숙명 앞에서 속수무책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사람의 눈에는 그 사람의 심장이 올라와 있다/ 중요한 순간이다”(「심장이 올라와 있다」) 눈 비비고 다시 읽게 되는 구절이다. 사람의 눈에 심장이 올라와 있다니! 그럴 때 눈과 눈 사이의 소통은 타락한 말들의 난장 속에서 얼마나 순정할 것인가.
― 신형철(문학평론가)

강릉 출신 박용하 시인이 네 번째 시집 『견자』를 펴냈다. 시집은 제목처럼 삶에 대한 시인의 ‘노려봄’으로 가득 차 있다. ‘고통하는 인간’인 시인은 매순간 ‘심장’과 ‘영원’을 발견하기 위해 사물의 배후를 응시하고 또 냉철하게 자신의 심연을 노린다.
팽팽하게 긴장된 문장들은 중언부언하지 않고 목을 베인 듯 치명적이다. 이렇듯 시집 『견자』에는 실존과 본질, 허위와 가식과 부조리에 대한 시인의 눈빛이 단호하게 서려 있다.
가령 시인이 「행성」에서 “그러니까 매순간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매순간 죽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날아야 한다/ 매순간 심장을 날아야 한다/ 그러니까 심장을 날기 위해선/ 매순간 사랑해야 한다”라고 쓸 때, 이 발설들은 틀림없이 근원과 바닥, 그리고 삶의 진정성에 대한 시인의 갈구로 읽힌다.
자신의 내부(內部)에도 서늘한 비수를 겨누는 게 박 시인이다. “너를 포기하기 전에/ 나를 포기하기가 언제나 어려웠고/ 너를 무시하기에는/ 너의 힘이 너무 강대했고/ 너를 넘어서기에는/ 나의 포기가 너무 졸렬했다”(「원수」), “거기에는 졸렬한 나와 옹졸한 내가 있고/ 치사한 나와 비겁한 내가 있는 것이다”(「거울」). 그러나 이 같은 ‘고통의 언어’ 속에서도 시인은 때로 아뜩한 서정을 풀어놓기도 한다. “그 아이가 어쩌다 울 때/ 눈물로 꼭꼭 서러움 찍어 바르듯 울 때/ 아이의 손등에서는 백합이 핀다”(「애들이 나빠 봐야 얼마나」)거나 “강가에는 소원성취 초 꽂아놓고/ 누군가 빌다 갔더군요/ 물 보러 갔었어요/ 당신 생각이 문득 올라오더군요/…/ 견딜 수 없는 것들만/ 삶이 되겠지요”(「강물」) 같은 시구들은 사뭇 다른 아름다움이다.
― 민왕기(시인)

누가 자꾸 삶을 뛰어내리는가
누가 자꾸 초읽기 하듯 심장을 뛰어내리고 있는가

그렇다면 네 영혼은?
네 손목은? 네 발목은?

누가 자꾸 지구를 뛰어내리는가
누가 자꾸 햇빛과 달빛을 뛰어내리고 있는가
눈물도 심장에서 뛰어내린다

그렇다면 네 슬픔은?
네 진눈깨비는? 네 고통은?

너의 심장은 발바닥에서부터 뛴다
너의 노래는 머리카락에서도 자란다

그렇다면 네 피는?
네 시선은? 네 호흡은?

물에 빠진 사람은 물을 짚고
허공에 빠진 사람은 허공을 짚을 때처럼
빠지는 것을 계속 짚을 때처럼

누가 계속 죽음을 뛰어내리는가
누가 계속 초읽기 하듯 심장을 뛰어내리고 있는가
― 「견자見者」 전문

더 무슨 말을 보탤 것인가. “사람의 눈에는 그 사람의 심장이 올라와 있다”(「심장이 올라와 있다」)는 문장에서 박용하의 ‘견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가늠하고도 남는다. 견자의 눈을 피해갈 방법은 도무지 도저히 없겠다. 2007년의 『견자』는 17년이 지난 지금 2024년에도 여전히 유효한 견자의 단말마 외침이겠다.

말이 타락한 견자(犬子)들의 세상은 과거나 지금이나 전혀 변함이 없으니, 우리는 여전히 시집 『견자』를 읽고, 『견자』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