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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평범

  • 저자 : 박용하
  • 출판사 : 달아실출판사
  • 발행일 : 2024년 02월 16일
  • 페이지 : 140면
  • ISBN : 979-11-7207-003-8 (03810)
  • 정가 : 14,00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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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발효시킨, 시를 뚫고 나온 산문
― 박용하 첫 산문집 『위대한 평범』


1989년 『문예중앙』을 통해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평범을 거부하고, 같음을 거부하고, 타협을 거부하고, 오로지 오롯이 자신만의 언어로 자신만의 시세계를 구축해온 시인 박용하가 생애 첫 산문집 『위대한 평범』(달아실 刊)을 펴냈다.

시인 박용하는 이 산문집 자서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하루하루가 일생이다. 일생은 또 하나의 먼 하루. 하루를 살면 하루가 줄어든다. 시를 쓰기 시작한 지 42년 만에 첫 산문집을 낸다. 시는 나의 일. 삶은 나의 시. 매 순간, 이 순간, 모든 순간 시가 반짝인다. 삶이 반짝이듯.”

4부로 구성된 이번 산문집에 수록된 산문은 모두 22편에 불과하다. <2부. 시선과 호흡>과 <4부. 서정과 격정>은 각각 부의 제목과 동일한 한 편의 산문만을 싣고 있다. 두꺼운 시집보다 더 얇은 산문집이다. 마음만 먹으면 반나절이면 다 읽을 수 있다. 반나절도 과하다는 이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읽고 난 후의 당신의 감정은 요동칠 것이다. 섬광과도 같은 문장들이 당신의 심장을 꿰뚫었을 테니까.

다시 냉정하게 산문집에 수록된 편편을 들여다보면 시의 문장인지 산문의 문장인지 도통 헷갈린다. 산문이라고 하기에는 시 같고, 시라고 하기에는 산문이 분명한 듯하니, 대략 시의 언어로 지은 산문이라 할 수도 있겠다. 본문(91~92p)에 쓰인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그의 산문은 “시가 발효된 산문”이다.


― 잘 쓴 산문이 뭐지?
― 힘 있는 산문.
― 힘 있는 산문은 뭐지?
― 언어가 피부를 뚫고 들어가는 산문.
― 언어가 피부를 뚫고 들어가는 산문은 뭐지?
― 언어가 피부를 뚫고 나온 산문.
― 언어가 피부를 뚫고 나온 산문은 또 뭐지?
― 몸이 말하는 산문. 사물이 생물 하는 산문.

믿지 않겠지만/믿기 싫겠지만 산문의 저력이 시의 저력이야.
또한 시의 저력이 산문의 저력이야.
시가 발효하지 않는 산문을 무슨 낙으로 읽어.
- 「잡문의 대가」 부분


또한 이번 산문집은 지금껏 써온 박용하의 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 훌륭한 지침서이며 나아가 박용하의 시론집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령 본문 속 이런 문장들을 보자.


“어느 날 한 편의 시가 내 삶으로 들어왔다. 내 심장으로, 내 혈관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나의 일상은, 나의 세계는 변했다. 변화했다. 단지 한 편의 시를 읽었을 뿐인데, 나의 평범한 하루는 다른 하루가 되었으며,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슬픔과 기쁨이 다르게 도래했다.”(「하루의 깊이」 부분, 96p)

“시인은 자신이 쓰는 산문 한 구절조차도 시에서 멀리 가지 않으며, 시를 내장하고 있으며, 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산문이라고 해서 직무 유기할 수도 없다.(104p) 내게 시 쓰기는 한 줄 쓰기며, 한 줄 쓰기는 첫 한 줄 쓰기며, 시의 첫 한 줄에 그 시의 구할, 아니 그 시의 전부가 걸려 있는 글쓰기다. 시의 첫 한 줄을 쓰고 두 번째 줄을 쓰는 게 아니고 다시 첫 한 줄을 쓰면서 그렇게 수십 줄의 시를 죽 밀어붙이는 방식이다.”(「한 줄의 시」 부분, 106p)


박용하 시인은 자서에서 “매 순간, 이 순간, 모든 순간 시가 반짝인다”라고 했는데,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이번 시집의 가장 큰 매력은 한 편 한 편이 시를 내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표제작인 「위대한 평범」은 웬만한 산문시보다 훨씬 짧은 산문이다. 전문을 읽어보자.


“그리운 평범이여!”

어떤 죄수가 한 이 말을 처음 접했을 때 내 뇌에 뇌우雷雨가 치는 느낌이었다. 그리운 평범이라? 위대한 시인이 썼으면 평범했을 말인데, 죄수 그것도 장기수가 한 말이어서 그런지 더 위대하게 다가왔다. 위대한 평범이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평범하게 살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평범하게 살 수 있는 사람만 평범하게 살아가리라. 별 특별할 것도 없는 나날들이, 평범한 일상의 나날들이 기실 특별하고 위대한 나날들이었다는 걸 각성하는 날이 오지 않는 게 인생의 좋은 날이었음을 알게 되는 날이 온다. 위대한 평범이여!
― 「위대한 평범」 전문


‘시를 내장한 산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박용하는 최악을 다해 쓸쓸한 인간이고, 인간적인 것을 거부하면서 쓸쓸해지는 인간이다. ​그는 아무것도 아니어서 서러운 인간이고, 동쪽이 그리워 서쪽을 서러워하는 인간이다. ​그는 개를 싫어하면서 개를 서러워하는 인간이다. 그가 개를 서러워하는 것은 언제 물지 모르기 때문인데, 그런 까닭으로 또한 인간을 서러워하는 인간이다. ​그의 위악과 쓸쓸함과 서러움은 모두 시로 비롯된 것인데, 그런 까닭으로 그는 무한한 시인이며 유한한 시인이다.

시인 박용하의 생애 첫 산문집 『위대한 평범』은 박용하가 왜 박용하인지, 시인 박용하의 진면목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산문집이고, 모름지기 시인이 쓰는 산문집은 이러해야 한다는 전형―시를 발효시킨, 시를 뚫고 나온 산문―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