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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무릎에 앉은 기억이 있다

  • 저자 : 김미량
  • 출판사 : 달아실출판사
  • 발행일 : 2023년 10월 10일
  • 페이지 : 152면
  • ISBN : 979-11-91668-90-2 (03810)
  • 정가 : 10,00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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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을 건너 미량에 다다르다
― 김미량 시집 『신의 무릎에 앉은 기억이 있다』


대전 출신으로 2009년 『시인시각』(현 『시인동네』)로 등단하여 현재는 속초에서 시작 활동을 하고 있는 김미량 시인이 등단 14년 만에 첫 시집 『신의 무릎에 앉은 기억이 있다』를 펴냈다.

김미량 시인의 초고를 받아보고 출간을 결정하는 데는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며, 이번 시집을 편집한 시인 박제영은 이렇게 얘기한다.

“십수 년 전 동학사 그늘에서 처음 그 여자를 만났다. 손목에 네잎클로버 문신을 한 여자는 명랑하게 말을 더듬었다. 시 시를 쓰 쓴다고 했다. 아 아직은 부 불량이라고 했다. 독을 숨긴 유혈목이 같았다. 가시를 숨긴 찔레 같았다. 십수 년이 지나서 기억이 흐려지고 동학사 그늘마저 흐려질 때쯤 우연과 필연의 중간쯤에서 그 여자를 다시 만났다. 네잎클로버 문신은 여전했고, 명랑하게 말을 더듬는 것도 여전했지만, 그 사이 여자의 배는 만삭이 되어 있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묻자 그 사이 부 불량을 건너 미 미량에 다 다다랐다고 했다. 내 아 아이들을 꺼 꺼내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더 이상 유 유산할 수는 없다고. 피할 도리가 없었다. 여자의 자궁을 뚫고 마침내 세상에 나온 아이들이 울음을 터트리자 그제야 여자는 새끼들을 쳐다보며 웃었다. 미량에서 다시, 미량까지 그것은 이독제독(以毒制毒)의 처방전이었다.”

그리고 시인 임재정은 이번 시집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김미량에게 시는 삶이 가진 필연적 결핍을 적극 옹호하는 ‘나의 편’이다. 그가 현실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악착같이 시와 연을 맺어온 까닭일 것이다. 따라서 시집 전편을 통해 줄곧 시인이 되묻는 함의를 포함한 「미량」은 자신에 대한 질책과 삶의 여정, 다정한 다독임을 동반한다. 내적 울음이 함께할 것이 틀림없을 이 과정들은, 그러나 담담하고 자조적이며 때로는 명랑하다. 꿈의 영역이기도 하기에 솟구치고 추락하지만 끝내 「다시, 미량」이라는 추임새와 함께 날갯짓을 예비하기도 한다. 스스로에게 내리는 축원 때문에라도 시인은 마술사가 되고 「스님, 책임져요」에서 보듯 ‘손끝에서’ ‘꽃’을 피우는 내일의 마술에도 가 닿는다. 오래 생활과 싸우며 쌓아올린 시집 『신의 무릎에 앉은 기억이 있다』는 새로운 미래를 향한 날갯짓이 될 것이 분명하다. 다함께 독자가 되어 김미량이 꺼내올 미래를 기다려보기로 하자.”


어떤 맛일까, 미량은

궁금해요 내 혀는 몸 어디에도 닿지 않으니
꽃밭에 누워 하품하는 나를 맛볼 수 없죠

설렘은 커다란 귀를 쫑긋 세우고
인기척에 놀란 벌떼와는 좀 다른 거겠죠

벌 같은 걸까요
내 몸엔 독성 미량이 함유되었으므로 조심하세요
주의사항은 늘 늦게 읽히죠

미량이어서
이마만 동그랗게 부풀었습니다
미량 보존의 법칙은 이마에도 유효합니까
입술이 누굴 환영하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방금 누가 내 이름을 불렀습니까
미안, 트림이 나왔어요

하이, 박사님
머릿속이 흐린 날이 너무 많아요
극미량이라면서요
열 숟가락쯤 상상을 추가하면
여우처럼 보일까요

한 숟가락의 상상으로
얼마나 많은 늑대를 길렀는지는 말하지 않은
실험실에서의 하루

미량스럽다,는 말은 그쯤일 거라 생각했다
― 「미량」 전문


김미량의 이번 첫 시집은 시인 자신의 이름을 차용한 「미량」이라는 시로 시작해서 「다시, 미량」으로 끝을 맺는다. 이에 대해 해설을 쓴 시인 최은묵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신의 무릎에 앉은 기억이 있다』가 「미량」으로 열고, 「다시, 미량」으로 닫는 부분은 눈여겨볼 지점이다. ‘미량’은 의미적으로는 아주 적은 분량을 뜻하면서 동시에 시인의 이름이지만, 형식적으로는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이다. 다시 말해 이 시집은 ‘미량’에서 ‘다시, 미량’까지의 여정이며, ‘김미량’이 담고자 했던(혹은 담아야만 했던) 오랜 시간의 ‘김미량’인 셈이다.”

“‘미량’은 사전적 의미와 시인의 이름이라는 두 값이 등치를 이룬다. ‘어떤 맛일까, 미량은’이라는 질문은 의식과 무의식이 공존하는 순간 발화한 언술이며, 아울러 주관적인 자아와 객관적인 자아의 간극에서 제시하는 물음이기도 하다. 시적 물음에 ‘상상’은 필연이다. 김미량은 상상의 영역을 화자와 독자에게 함께 제시한다. 이러한 상상의 과정에서 우리는 미량이 어떤 맛일지 서서히 알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미량스럽다’는 무엇일까? 어느 계절 안쪽에 멈춰 있는 기억일까? 아니면 ‘머릿속이 흐린 날’의 표정일까? ‘늘 늦게 읽히’는 ‘주의사항’처럼 우리는 이 시집 곳곳에 스며 있는 ‘독성’이 ‘어떤 맛일’지 미리 상상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주의사항’을 모른 채 몸으로 맞닥뜨리는 시도야말로 ‘미량스럽다’라는 의미를 날것 그대로 느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돌을 던진다 하나, 둘, 셋, 던진 돌에 번진 파문들이 돌에 되돌아오다 파문을 만나 서로를 건넌다 나는 당신이 어디서 나와 마주쳤는지 어디서 나를 건넜는지 알지 못한다 돌의 부피만큼 불어난 호수의 물은 어디로 갔을까 기슭에 오래 앉아 있었고 어둠이 내렸다 호수와 내가, 어둠과 내가, 당신과 내가 없다 해도 아침이 올 것이다 호수와 무관한 내 눈이 조금 넘쳤던 것 같았다 돌은 내 가슴에 떨어졌을까
― 「다시, 미량」 전문


그러나 무엇보다 이번 시집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열쇠는 「물집」이라는 시일 것이다. 김미량 시인이 스스로 이번 시집을 정의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에 도착한 사람 이야기입니다// 뜨거운 세계// 숨을 곳이 필요한// 따가운 시선을 피해// 건축 설계에 없는 그늘을 준비하는 동안// 빠르게 부풀려 완성한 집// 소문처럼 비웃는 집// 얼음처럼 서늘한 말// 그늘을 빌려 쓴 이해할 수 없는 사람 이야깁니다// 그이가 창문을 깨고 나가면// 소독이 필요한 집// 걸어가는 눈물과 떨어지는 빗물뿐인// 나를// 견디는 당신의 이야깁니다
― 「물집」 전문


“건축 설계에 없는 그늘”과 “그늘을 빌려 쓴 이해할 수 없는 사람 이야기”라는 문장과 “걸어가는 눈물과 떨어지는 빗물뿐인// 나를// 견디는 당신의 이야기”라는 문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사전적 의미망을 벗어난 문장이니 독자는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며, 나를 통과한 타자들 그리하며 마침내 당신이 보일 것이라는 이야기가 아닐까. 확인하고 싶다면 일독을 권한다. “미량”으로 열리고 “다시, 미량”으로 닫히는 이 독특한 시집이 당신 안의 미지의 문을 열어주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