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아실시선

해물짬뽕 집

  • 저자 : 박수서
  • 출판사 : 달아실출판사
  • 발행일 : 2018년 01월 10일
  • 페이지 : 120면
  • ISBN : 9791188710058
  • 정가 : 8,000 원

도서구매 사이트

원하시는 사이트를 선택하여 주세요.

1
박수서 시인의 네 번째 시집을 펴낸다. 이번 시집은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음식에 관한 이야기다. 요리와 맛집에 관한 이야기다. 아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지지고 볶고 울다 웃고… 그렇게 한솥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 그 관계에 대한 이야기며, 먹고 사는 아주 사소하고 유치한 문제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당신과 당신의 식구에 관한 이야기며, 당신과 당신의 동료에 관한 이야기며, 당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관한 이야기다. 아니다. 이 시집은 당신 참 열심히 살았다며 당신의 등을 토닥이는 위로겠다. 그렇다고 심각하게 위로를 건네지는 않는다. 그저 밥이나 같이 하자며 무심히 한 마다 툭 던지는 거다. “여기 잡탕밥 둘!”


여기 잡탕밥 둘!

사는 게 뭐라고
그까짓 인생이 뭐라고
섞고 볶다 보면 그게 그거 아니겠어
새우의 갑옷을 벗기고,
오징어를 칼등으로 으깨고,
해삼을 능지처참하고,
전복을 비응도飛鷹島 우럭처럼 날리고,
소라의 어깨를 긁어
고추기름, 식용유, 대파, 마늘, 간장, 굴소스가
떡 하니 입 벌려 날름 밥을 받아먹고
뒹굴다 보면 잡탕밥 아니겠어
사는 일이 짬짬하고 싱거울 때
삶의 날것들을 모아 채썰기라도 하여
모아두면, 아니 이 삶과 저 삶 위에 달걀 하나 툭,
까 올려 비비고 볶아 본다면 알겠지
사는 일이 뭐라고
지지고 볶으며 날마다 날마다
잡탕밥을 짓고 있는 일이라고
- 「잡탕밥」 전문


2
박수서 시인은 시집 『슬픔에도 주량이 있다면』을 통해 ‘뽕짝시’라는 새로운 장르를 보여 준 바 있다. 박제영 시인은 박수서의 시를 세상에 없는 뽕짝시라며 이렇게 얘기한 바 있다. “트로트… 흔히 뽕짝이라고 부르는 노래… 다른 장르의 노래는 몰라도 트로트를 제대로 하려면 세월이 필요하다. 세상 풍파 제대로 겪고 세상 설움 제대로 겪어야 비로소 트로트가 제 소리를 내는 법이다. 음정 박자 맞춰서 부른다고 트로트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음정은 조금 틀려도 박자는 조금 틀려도 그 소리에 모진 세월이 모진 설움이 굳은살로 박힐 때 트로트는 비로소 진짜 뽕짝이 되는 거다. 선술집 과부 주모가 동백아가씨를 뽑으면 막노동에 지친 사내들이 젓가락 두드리면서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맞장구로 뽑을 때, 진짜배기 트로트는 거기에 있다. (…중략…) 서정은 서정이되 트로트만의 서정이 있는 법. 뽕짝이 될 수 있는 서정이 있는 법. 뽕짝이 될 수 있는 운과 율이 있는 법. 묘하게도 박수서의 시편들은 그런 트로트의 서정과 트로트의 운율이 도드라진다. 리듬은 빠르고 단순한데 정서는 느리고 아픈, 형식과 내용의 이율배반이다. (…중략…) 트로트와 시의 이종교배. 박수서는 이번 시집을 통해 뽕짝시라는 새로운 장르를 세상에 내놓는 것이다.” 어쩌면 이번 시집도 그런 뽕짝시의 연장선상에 있겠다. 그러니 그의 시는 고급 식당에서 고급스럽게 읽어서는 안 된다. 그저 재래시장 어느 선술집에서 탁주 한 사발 마시고 젓가락 두드려 가면서 읽어야 제 맛이겠다.


전주에 유명한 것이 비빔밥만이 아니다
순대국밥, 콩나물국밥, 초코파이가 다가 아니다
가게 맥주 마셔 본 적 있는가
병맥주를 마시며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고 오순도순 입방아를 찧다
명태포를 기승전결로 찢어 본 적 있는가
대가리는 숙주와 함께 탕으로 올리고
이빨이 델 만큼 뜨겁고 단단한 명태포를 씹어본 적 있는가
어느 날 씹다 만 포를 삼키다
명태보다 가시가 많고 통으로 씹기 어려운 것이 무얼까 생각하다
삶은 권태!
이것을 어찌 씹어 삼킬까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라
작정하면 권태쯤 부드럽게 요리할 수 있다
당신 뚝배기에 육수 우러나면 대파 크게 썰어 넣고
권태를 아무도 모르게 한번 익혀 올려놓으면 될 일이다
- 「임실슈퍼」 전문


3
시집 해설에서 김형미 시인은 박수서 시인의 삶과 시를 일러 ‘날것’이라며 이렇게 얘기한다. “날것은 사실 싱싱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다. 그리고 살아 있을 때 피를 얼마나 잘 처리했느냐에 척도가 달려 있다. 피를 제대로 제거하지 않으면 역한 비린내가 나서 날것으로서의 생명력을 잃는다. 역설적으로 얘기하자면, 날것만큼 안전한 음식도 드물다. 지식과 기술을 갖춘 전문조리사여야만 다룰 수 있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박수서 시인은 시인 자신이 날것으로 살면서 삶을 보다 진지하게 비비고 볶아본 것이다. 그러기에 칼끝에서 완성되는 날것의 맛을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닐까. 설령 사는 일이 잡탕밥을 짓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학자들은 인류가 문명화된 것은 그 기원이 실은 불의 사용에 있다고 한다. 불을 사용하면서 인류는 지금의 문명까지 진화 발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불을 얻은 인류는 ‘날것’으로서의 순수함(자연이야말로 날것 그 자체 아니던가)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시인이 이번 시집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 중 하나는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날것’에 대한 회복이겠다.


톱밥 같은 눈이 내리는 새벽
목각 인형처럼 대합실에 앉아 있는 노인은
꾸벅꾸벅 새처럼 졸다, 기적 소리에 눈을 뜨네
그의 눈은 파란 하늘처럼 맑았으나
구름 떼가 울음을 몰고 오네
눈물이 언 땅을 녹이고
세상도 봄처럼 팔 벌려 꽃밭이 되네
원산행 기차에 몸을 실은 노인은 눈을 감고
철로의 울림에 낮게 귀를 내려 자장자장 달리네
고향의 풀, 나무, 돌, 산을 지나
새소리 우렁찬 개울가에 닿네
피라미를 잡다 무럭무럭 올라오는 밥 익는 연기에
고무신보다 먼저 집으로 달려가네
잘 익은 김치가 입안에서 아삭 아삭 꼬리짓하네
배부른 소년은 아궁이 앞에서 입 벌리고
고양이털처럼 잠드네
주먹밥처럼 폭설이 내리는 폐역에서
꽁꽁 언 저수지처럼 텅 빈 대합실에서
노인이 말 떼를 몰고 북으로
북으로 달려가네
기차가 다시 말처럼 달리네
- 「신탄역에서」 전문


4
삶은 90%의 슬픔과 괴로움을 10%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위로 받으며 간신히 버텨내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 10%의 기쁨과 즐거움 속에 이 시집 한 권을 슬그머니 보태려 한다. 누군가는 퇴근길, 포장마차에서 닭똥집에 소주 한잔으로 지친 하루를 위로 받기도 하는 법이니, 이 시집이 당신에게 소주 한잔만큼의 위로라도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시라는 게 어쩌면 딱 그 정도의 쓸모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