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시·에세이

슬라브식 연애

  • 저자 : 박정대, 전윤호, 최준
  • 출판사 : 달아실출판사
  • 발행일 : 2017년 12월 30일
  • 페이지 : 188면
  • ISBN : 9791188710027
  • 정가 : 12,00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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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이라는 둥지”

이 시집의 저자인 3인의 시인들은 모두 강원도 정선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시에 대한 입문을 춘천에서 했다는 공통점도 지니고 있다. 그래서 3인의 시인들은 춘천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시집을 내기로 했던 것이다. 전윤호와 최준은 춘천을 주제로 한 시 20편씩을 수록했고 박정대는 춘천과 정선, 강원도를 가지고 쓴 시들 20편을 보탰다. 이는 그들이 평생 시인으로 살게 된 계기를 만들어 준 춘천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며 또한 자신들의 가장 순수했던 시절에 대한 추억이기도 하다.

강원도의 작은 동네에서는 자녀들을 좋은 대학으로 보내기 위해 대도시로 유학을 보내게 되는데 보통 춘천, 강릉, 원주가 그런 도시들이었다. 그런데 이 3인의 소년들은 명문대를 가라는 부모의 염원을 안고 춘천으로 와서 물론 대학에 진학은 했으나 그만 시를 배우고 말았다.
그들이 고교를 다닌 1980년대 초는 군사 정권의 시절이었다. 아무리 시골에서 자라 정보에 어두웠다 해도 도청 소재지인 춘천에 살게 되면서 세상이 그동안 자신들이 알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에는 그런 상황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사랑한다, 슬프다, 사랑한다 중얼거리며 봄 속의 또 다른 봄을 보고 있다

네가 봄이런가
- 박정대, 「네가 봄이런가」 부분

아침을 밟고 다녔지 /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고 / 사북에 광부들이 일어났을 때 / 교련복을 입고 제식 훈련을 받았지 / 공수부대 나온 체육 선생이 / 이단 옆차기로 학생들에게 날아오르고 / 반공웅변대회가 악을 썼네
- 전윤호, 「열일곱」 부분

시절과 시대와 한 발짝씩 뒤처지면서도 내일을 영원이라 믿었던 사람들
- 최준, 「남춘천역」 부분

대학을 가기 위해 고교를 다니면서 그들은 교과서가 설명해 주지 못하는 것들을 느끼게 되었고 결국은 시로 빠져들게 된 것이다. 그러니 춘천은 순진무구한 산골 소년들에게 시라는 독을 주입한 곳이 되었다. 그 중독은 그들을 평생 시인으로 이끌면서 고쳐지지 않는 고질병이 되었다.

이 시집은 정선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동시대에 태어나 거의 비슷한 환경 속에서 자라난 세 시인이 어떻게 세상을 받아들이고 또 어떻게 자신들만의 개성을 가진 시를 쓸 수 있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춘천이라는 안개와 호수의 도시가 어떻게 시인을 만드는지도 알려준다. 해설은 평론가 박철화가 맡았는데 그 역시 강원고등학교를 동시대에 다녔던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타지에서 진학하여 다른 곳으로 떠나기 전까지 정거장처럼 들렀던 춘천에서 이 세 시인은 고통과 행복의 말을 함께 배웠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시골 촌놈인 그들에게 더 넓고 큰 세상은 얼마나 불친절했을 것인가. 그들은 거기서 세상의 현실이라는 거친 날줄에 시라는 말의 씨줄을 엮어 저마다의 생을 지었다.
-박철화 해설, 「춘천이라는 시」 부분

소양로 낡은 2층 건물엔 / 북치는 소년이라는 작은 카페도 있었지 / 그때의 드러머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 그때의 몽상가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 아직도 두드리면 춘춘 / 소리 날 것 같은 너를 천천 / 히 걷는다 오 / 춘천 / 북치는 소년이여
- 박정대, 「춘춘」 부분

고등학교 입학해 시가 옮았다 / 매독처럼 평생 / 건전한 생각을 갉아먹었다 / 잠복 기간 동안 내성을 키우렴/ 우린 정상인이 아니니 / 페니실린 주사도 소용 없단다 / (…중략…) / 시골서 올라온 아이들에게 / 치명적인 환경이었다
- 전윤호, 「춘천 1980」 부분

춘천이 이러면 어때? / 음악과 연애와 친구들의 거리인데 / 방화만 저지르지 않으면 / 싫든 좋든 다 후배 친구 선배 선생님 / 안녕하세요 사랑해요 / 웃으며 인사할 수 있었는데
- 최준, 「소방서 앞에서의 후회―춘천․12」 부분

사실, 박정대, 전윤호, 최준 세 시인은 강원도 정선과 춘천이라는 공통의 분모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각자 개성이 워낙 강한 시인들이다. 시적 경향도 전혀 다르다. 그런 세 시인의 시가 한 책에 묶이면 어떤 화학 반응이 일어날까. 그런 질문에서 이 시집은 시작되었다. 그 결과는 이제 순전히 독자들의 몫이겠다. 같은 듯 다른 풍경, 다른 듯 같은 풍경 속에서 청춘의 어떤 색을 떠올리든 그것은 이제 순전히 독자의 몫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