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시·에세이

여자의 말

  • 저자 : 이바라기노리코/ 성혜경 옮김
  • 출판사 : 달아실출판사
  • 발행일 : 2019년 04월 10일
  • 페이지 : 228면
  • ISBN : 9791188710331
  • 정가 : 11,00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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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사람의 길을 걸을 뿐이다
― 이바라기 노리코 시선집 『여자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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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문화 그리고 예술을 아우르는 종합문예지 월간 『태백』을 만들던 2017년 초의 일이다. 어느 날인가 『태백』의 발행인이기도 한 소설가 김현식 형과 소주를 마시던 중이었는데, 형이 문득 이바라기 노리코 이야기를 꺼냈다. 정확히는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 「내가 가장 예뻤을 때」에 관한 이야기였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우리나라는 전쟁에서 패했다 / 그런 바보 같은 일이 있을 수가 하고 / 블라우스의 소매를 걷어붙이고 비굴한 거리를 활보했다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라디오에서는 재즈가 흘러넘쳤다 / 금연(禁煙)을 깼을 때의 현기증을 느끼며 / 나는 이국(異國)의 감미로운 음악에 탐닉했다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부분

그때 이바라기라는 시인을 처음 알았다. 그와 그의 시가 무척 궁금해졌다. 월간 『태백』에 이바라기 노리코를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에 취해 혹시라도 잊어버릴까 싶어 수첩에 메모를 해두었다. “이바라기 노리코 연재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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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바라기 노리코에 관한 글을 누구에게 청탁할 것인가. 이바라기 노리코와 그의 시에 정통한 사람을 수소문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그런 사람이 없었다. 인터넷을 검색한 끝에 마침내 한 사람을 찾아냈다. 성혜경 교수. 그는 이바라기 노리코에 관한 꽤 많은 논문을 발표했는데, 서울여대 일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그의 사무실로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월간 태백을 만들고 있는 박제영 편집장입니다. 이바라기 노리코에 관한 글을 태백에 연재하고 싶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찾아뵙고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이바라기 노리코의 삶과 문학」이라는 주제로 성혜경 교수께서 월간 『태백』에 글을 연재하게 된 배경이다. 성혜경 교수의 글은 2017년 4월호부터 2018년 5월호까지 연재되었는데, 연재를 시작할 당시 나는 한 가지 더 부탁을 드렸었다. 이바라기 노리코 번역 시집이 아직 국내에 없는데, 이참에 선생님께서 번역한 이바라기 노리코 시선집을 내고 싶다고. 그러니까 이번 이바라기 노리코 시선집은 처음 기획한 때부터 따지면 꼬박 2년 만에 나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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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이바라기 노리코 시선집 『여자의 말』에는 총 85편의 시와 수필 2편이 실렸다. 이라바기 노리코가 생전에 냈던 여덟 권의 시집(『대화』, 『보이지 않는 배달부』, 『진혼가』, 『인명시집』,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촌지』, 『식탁에 커피향 흐르고』, 『기대지 않고』)과 유고시집 『세월』에서 성혜경 교수께서 81편을 엄선하였고, 시집 미수록 작품으로 ‘「혼자일 때 생기발랄」, 「12월의 노래」, 「호수」, 「행방불명의 시간」’ 등 4편을 더하였다. 수필 2편은 이바라기 노리코의 수필집 『한글로의 여행』에 수록된 작품이다.

처음 기획했을 때보다 시선집이 좀 더 두꺼워졌다. 성혜경 교수께서 중국인 강제 징용 문제를 다룬 장시(서사시) 「류리엔렌의 이야기」와 수필 2편을 추가한 까닭이다. 그런 까닭에 편집하는 데 시간이 좀 더 오래 걸렸고, 어려움도 조금 있었지만, 막상 결과물을 놓고 보니 잘 되었다는 생각이다.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그 깊이를 더할 수 있게 되었고, 2편의 수필은 이바라기에게 있어 한국은 어떤 나라인지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 교과서에 실려 일본 사람들에게 윤동주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던 이바라기 노리코의 수필 「윤동주」는 한국 사람이라면 꼭 읽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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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내게 이바라기 노리코는 「내가 가장 예뻤을 때」를 쓴 일본 시인이었고, 한국과 한국어를 사랑하였으며 윤동주를 일본에 알린 시인일 뿐이었다. 정작 그의 시와 그의 시 세계에 관하여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번 시선집을 편집하면서, 그의 시편들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그가 단지 유명한(?) 시인이 아니라 아니 오히려 그러한 허명을 거부한 진짜 시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보편적 인류애에 근거하여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에 따라 일본인이면서 일본의 제국주의를 비판하였고, 타자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시로 풀고 있다.

성혜경 교수는 옮긴이의 말에서 이바라기 노리코를 이렇게 평가한다.

“이바라기의 시에는 사회와 논단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 정신과 폭넓은 사회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이바라기 시의 참신함과 독자성은 여성 시인으로서 입지를 관철하면서도 종래의 ‘여성성’에 안주하거나 그 틀에 사로잡히는 일 없이 오히려 이를 과감하게 깨며 새로운 지평을 열어간 점에 있다.”
“이바라기는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쓰려고 노력하였고, 사람들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갈망하였다.”
“이바라기는 지성인으로서의 양심을 저버리는 일 없이 늘 깨어 있는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며 일본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아마 이번 시선집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동감하고 공감할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누구든 이바라기 노리코라는 시인을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단지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어를 사랑한 시인이라서가 아니라, 단지 윤동주를 일본에 알리고 윤동주를 사랑한 시인이라서가 아니라, 그의 시가 담아내고 있는 보편적 철학과 사상이 전하는 울림이 크고 깊은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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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이번 시선집이 나오기까지 성혜경 교수의 노력이 얼마나 컸는지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시편들을 선정하는 것에서부터 문장은 물론 단어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바라기 노리코에 대한 성혜경 교수의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었다. 성혜경 교수의 각고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번 시선집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 시선집을 기획하고 편집한 사람으로서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씀을 드린다. 이바라기 노리코 선생도 분명 기뻐하실 것이다.